201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앞두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요한 바오로 2세를 시복했다. 물론 시복과정이란 것이 이런 교회정치적 포석과 상관없는 것일지라도, 유례없는 단기간에, 그것도 선종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요한 바오로 2세를 시복해야 했던 베네딕토 교황의 심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성인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새로운 복자, 새로운 성인이 한 분 더 탄생한다는 것은 경축할만한 일이다. 게다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에 두 차례나 방문해서 한국교회와 국민들에게 친숙한 이름이기에 그 느낌 또한 각별하다.
사회적으로 진보, 교회적으로 보수적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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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경제적으로는 진보적이고 또한 강력한 인권옹호자지만,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라고 전한다. 그가 내놓은 회칙 가운데 <노동하는 인간>을 읽어본다면 그의 ‘노동문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감’을 십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페니 러녹스는 이러한 설명이 요한 바오로 2세를 설명하는데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교회구성원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게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묻는 것이다. 그만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복잡한 이면들을 갖고 있다.
교회문제와 관련해, ‘획기적인 교회변화’를 이끌었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공의회 신학자였던 프랑스의 마리 도미니크 체누의 증언에 따르면, 폴란드 크라쿠프 대주교로 공의회에 참석했던 보이티야 대주교(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는데 반대했다고 전한다.
“그가 마음속에 그린 것은 백성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가 사제와 주교의 지도하에 신앙 안에서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활동하는 ‘완전한 사회’였다. 그런 사회치고 ‘완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보이티야는 진실한 가톨릭인들은 개인의 구원을 추구함으로써 굶주림과 폭력 및 그 밖의 사회적 정치적 부정의로부터 ‘진정한 인간해방’을 달성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체누는 이를 두고 ‘절대군주제인 교회모델’이라고 말했다. 이는 보이티야 대주교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폴란드에서 사제들은 민족주의와 가톨리시즘을 지켜낸 장본인들이었고, 종교행사 역시 정치적 저항의 한 형식이었다. 외세로 인한 억압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절대군주제적으로 유지되던 교회제도 때문이었다. 이는 교회 밖의 군사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이루었던 중남미 교회와 대조적인 경험이었다. 소련 제국주의아래 살던 폴란드 경험에서 보이티야 대주교에게 민주적 교회란 자살행위로 비추어졌다는 점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보편교회에게는 비극의 원천이 된다. 이는 스페인 내란 한가운데 성직자들이 학살당하는 경험 속에서 <오푸스 데이>를 창립한 에스크리바와 요한 바오로 2세가 깊이 동조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매우 영성적이고 어린이를 사랑한 교황, 교회 안에선 '순종'을 강조
요한 바오로 2세는 단일정부가 아니라 단일한 신앙으로 통일된 유럽을 원했다. 인권은 그토록 자비로운 심성을 지녔던 교황이 내세우던 중요한 구호 중 하나였지만, 제1차적 권리는 언제나 종교의 자유, 더 구체적으로 가톨릭의 권리였다. 그의 연설문과 회칙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교황은 냉혹하고 퇴폐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몹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물질적 소유에 관심이 없었고, 매우 영성적이며,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다. 또한 지칠 줄 모르고 교회에 봉사하며 때로는 적대적인 정부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것은 폴란드와 로마뿐이었기에 숱한 여행 중에서도 다른 민족들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지식인이면서 다른 지식들처럼 대중에 대한 경멸감을 지니지 않았으며,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와 성인들에 대한 찬양, 종교적 행렬에 대한 열광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민주의자의 모습이었으며, 민중의 집단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가톨릭상징들을 사제들이 잘 이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황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통해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관철시킬 방법도 터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마 가톨릭이 부패하지 않은 진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순종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였다. 그래서 한편에선 가난한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또 다른 한편에선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권옹호와 교회 내 순종이 그의 인격 안에서 무리 없이 통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교황의 태도 때문에 가장 먼저 고통을 경험한 교회는 브라질 교회였다. 로마교황청은 브라질교회를 그토록 힘차게 만든 해방신학과 기초공동체를 반대했다. 민중지향적인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자율적인 수평적 교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권위주의적이고 교황 중심적 가톨릭교회를 바라던 그에게 더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황은 브라질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추구하던 개혁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고 판단했다.
교황은 세계의 '양심'.. 그러나 교회 안의 인권은 실종 돼
교황청이 ‘지배계급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인 ‘지역교회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하자 지역교회의 많은 주교와 성직자들이 볼멘 목소리를 냈지만, 정작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브라질의 신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보프였다. 그는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에서 가톨릭이 직면한 문제는 ‘교회 안의 인권’이라고 밝혔다. 교회는 인권을 선포하는 세계의 ‘양심’이지만, 교회가 자신의 구조 안에서 인권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보는 교회’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구티에레즈의 입장을 지지했다.
아마 보프가 민중에 대한 당파성만을 주장했다면 그는 1984년에 교황청의 심문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민중을 위한 세상뿐 아니라 ‘민중에 의한 교회’를 말하자, 교황청은 그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 이후에 나타난, 진보적 신학자에 대한 교황청의 제재가 처음이 아니다. 보프를 심문했던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스힐레벡스와 한스 큉의 입도 가로 막았다. 이브 콩가르를 비롯해 이들 신학자들은 대부분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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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왜 교회 내 인권을 논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선교사들조차 제3세계의 사회적 고통을 치유하느라고 바빠서 교회 내에 도사린 무력한 이들의 고통과 권력화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신학자, 수도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구조를 변혁시키고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것보다 교회권력에 저항하는 게 더 어렵다. 교황 한 사람의 견해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전일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때, 사뭇 상황이 서로 다른 나라들 안에서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복음을 저버릴 위험이 있다. 이를테면,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신자들이 자신의 반공주의 노선을 따르기 원할 때, 이는 197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제3세계에서 군사독재를 유지해 오던 나라에선 우익정권에 대한 지지를 뜻하곤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임 시 교황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독일교회였다. 미국교회 다음으로 부유한 교회였던 독일 교회는 재정적으로 취약한 바티칸에서 유연한 미국교회와 달리 재정적 근육을 사용할 줄 아는 교회였다. 특히 쾰른의 요셉 회프너 추기경은 1987년에 선종할 때까지 바티칸의 재정을 관장했다. 그리고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청에서 회프너 추기경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한스 큉에게서 가톨릭신학의 교수자격을 박탈한 것뿐 아니라, 메츠 역시 그의 ‘정치신학’이 중남미의 해방신학을 고무했다는 이유로 처벌했으며, 여기에 격노한 칼 라너가 <나는 항의한다>는 글을 썼지만, 그 역시 라칭거 추기경의 블랙리스트 안에 들어갔다.
민중에 대한 당파성과 교황의 권력 사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편 <오푸스 데이> 등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이 운동은 강력한 규율과 교황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보여주는 등 폴란드의 전투적인 가톨릭과 비슷한 종교적 열정과 복종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도한 교황청의 재정위기를 벗어나는 데 <오푸스 데이>가 크게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항간에는 현재 교황청 정치를 오푸스 데이가 장악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무성할 지경에 이르렀다. 복고적 전통주의로 여겨지는 오푸스 데이의 영향력 확대는 곧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후퇴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편 1981년에 발표된 <노동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이론이 있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를 역설하고, 작업장에서의 민주주의를 어느 노조 지도자보다 잘 표현하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고 다양한 공헌을 하고 있는 노동운동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건설할 책임을 져야 하는 자신의 당연한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인간의 선의 관점에서 모든 사회문제를 보려고 한다면, 인간의 노동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다. 아마도 없어서는 안될 열쇠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평등의 원리를 교회 안에는 적용시키길 거부했다. 종교학자인 폴 레이크랜드는 이를 두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커다란 부분들(여성들, ‘참견하기 좋아하는’ 신학자들, 라틴아메리카 교회, 은퇴한 사제들,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기혼 남성들 및 여성사제를 지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취급은 교회의 공약의 진실성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난했다. 이 점에 대해 보프 신부는 “제도교회가 권력유지에 관심이 많지만, 그리스도는 약함과 권력없음을 당신 메시지의 토대로 삼았다”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설득력 있는 사랑의 메시지 때문에 그를 따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기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교황이 1978년 교황에 된 뒤로 바티칸에 감추진 존재가 아니라 104차례에 걸쳐 해외순방 길에 올라 129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젊어서 아마추어 배우 생활도 했으며, 생전에 극장을 사랑하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장엄한 행사를 선호했다. 몇 차례에 걸쳐 베드로대성전에서 열린 장엄예식의 준비를 영화감독인 프랑코 제피렐리에게 맡길 정도였다. 그가 해외순방에 나섰을 때 기다린 것은 장엄행렬과 성대한 미사였다.
1985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 방문했을 때는 꽃으로 뒤덮힌 높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열린 옥외미사가 제일 중요한 행사였다. 이런 미사에서는 늘 수많은 행상들이 교황의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나 수건, 초상화들을 팔았으며, 기업주들은 교황을 광고로 이용했다. 그리고 많은 진보적 신학자들은 교황이 장엄한 행사를 통해 교황권을 강화하려고 방문했다고 볼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황은 옳다”는 확신을 다져갔다.
그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5년에 선종하고 이제 그가 가장 신임하던 신앙교리성 장관 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이 되었다. 이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유지를 아직껏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는 여전히 바티칸에서 중요한 입김으로 작용하고, ‘해방신학의 아버지'라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활동하는 페루의 리마는 오푸스 데이 출신의 주교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선임자인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을 선종 후 6년1개월 만에 복자품에 올렸다. 이것은 요한 바오로 2세가 1997년 9월 9일 선종한 마더 데레사 수녀를 6년 1개월 10일 만인 2003년 10월19일 복자로 선포한 것보다 약 열흘 정도 앞당긴 것이다.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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